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저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덕후'라는 정체성을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란마 1/2>부터 <에반게리온>, <오! 나의 여신님>, <도키메키 메모리얼> 같은 고전 명작부터 최근의 <내 마음의 위험한 녀석>까지, 작품 속 여주인공들은 유부남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제 영감의 원천이자 흥미로운 탐구 대상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일본 서브컬처는 만화책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실사화로 이어지는 '3단 테크'가 전통입니다. 그중 애니메이션의 꽃은 단연 성우들이 빛나는 무대죠. 카세트테이프와 CD 플레이어를 지나 MD플레이어, MP3, 그리고 지금의 하이엔드 DAP에 이르기까지, 일본 여성 성우들의 보컬은 기기를 막론하고 제 귀를 즐겁게 해준 유일한 '상수'였습니다.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 '종결'에 대하여
유선 IEM을 취미로 가진 분들이라면 누구나 '종결'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삽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종결을 맛본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우리는 늘 새로운 소리에 매료되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합니다.
수천만 원의 재력으로 각 브랜드의 플래그십을 수집하는 콜렉터가 아닌 이상, 우리 같은 평범한 애호가들은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종결'을 꿈꿉니다. 이제 그만 방황하고 이 소리에 안착하고 싶다는 갈망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꼭 도달하고 싶은 일종의 유토피아와 같습니다.
듀만콘댐의 대척점, 그리고 찬란한 빛 '라디오소'
그런데 말입니다. 여보컬 덕질만 수십 년을 해온 제가 감히 단언컨대, '여보컬 한정'으로는 분명한 종결이 존재합니다.
물량 투입의 끝을 달리는 '듀만콘댐'의 유행과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모델, 바로 AME의 라디오소(Radioso)입니다. 스페인어로 '빛나는, 화사한'이라는 뜻을 가진 이 이어폰은 그 이름처럼 여성 보컬의 목소리를 샛별과 같이 빛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립니다.
드라이버가 10개씩 들어가는 것이 예삿일이 된 요즘, 라디오소가 보여주는 절제미는 오히려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단순히 소리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컬의 미세한 숨결과 잔향을 강렬하게 끌어올려 청자에게 전달하는 그 특유의 착색은 독보적입니다.
텅 빈 충만함, 소리의 향취에 취하다
라디오소는 결코 정보량이 쏟아지는 이어폰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비워냄' 덕분에 보컬은 더욱 가까워지고 질감은 극대화됩니다. 특히 다루기 까다로운 EST의 맛을 끝까지 살려낸 튜닝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깝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보컬로 정평이 난 이어폰들은 모두 거쳐왔습니다. 중학교 시절 소니 E888과 MD 플레이어로 '하야시바라 메구미'나 '사카이 노리코'의 목소리를 탐닉하던 제게 여보컬에 대한 갈증은 결코 쉽게 풀리는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꼽아볼까요? 수월우 카토, 씨오디오 유메, 키네라 베르단디, 그리고 최근의 캔퍼 74E까지. 모두 훌륭한 기기들이고 저마다의 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경험한 제가 감히 확언하건대, 라디오소를 듣고 나면 다른 기기들이 '여보컬 간판'을 내세우기엔 어딘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많은 드라이버가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재현한다면, 라디오소는 오직 주인공 한 명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독주 무대와 같습니다. 고음역대의 화사함은 자칫 자극적일 수 있는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중역대의 투명함은 성우의 감정선 하나하나를 가감 없이 전달합니다.
마침표를 찍는 소리
이제는 단종되어 구하기 어려운 모델이라 더 그런지는 몰라도 제가 이 녀석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수백만 원짜리 플래그십이 주는 압도적인 정보량보다, 내 취향의 본질을 꿰뚫는 단 하나의 소리가 주는 만족감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결국 종결이란 더 이상 살 게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여보컬의 향취에 듬뿍 취하고 싶은 날, 저는 오늘도 고민 없이 라디오소를 집어 듭니다.
제게 있어 이 빛나는 이어폰은 단순한 기기를 넘어, 수십 년 덕후 인생에 내린 가장 명쾌한 해답입니다.
여보컬의 종결, 그 끝은 단연 라디오소입니다. |